스크린에 띄워진 위태로움
〈물안에서〉와 〈콘크리트의 불안〉
잘 알려진 것처럼 〈물안에서〉의 모든 장면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성모가 영감을 찾아 헤매는 제주도의 풍경은 흐릿한 상태로 우리에게 보여지고, 그렇기에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지 추측해 볼 수 없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의 얼굴 또한 똑바로 볼 수 없다. 그들의 대화는 온전히 귀로 전해지지만, 내용은 어느 때보다 공허하고, 말과 속내의 간극을 상상해 볼 만한 표정은 똑바로 보이지 않는다. 인물들이 카메라로부터 멀리 놓여있는 장면에서는 귀로 들리는 말소리가 저들의 입에서 뱉어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물안에서〉의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는 그 안에 담긴 것들이 현실의 파편이 맞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에 놓여있는 성모의 내러티브 속 상태, 그리고 영화 만들기라는 소재와 공명한다. 극영화의 고전적 양식,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편집, 180도 법칙 등은 관객이 영화를 보며 경험하는 인위성을 지워나가며 스크린에 띄워진 이야기와 형상을 쉽게 실존하는 것으로 믿어지게 만들지만, 가끔씩 하나도 납득되지 않는 영화를 볼 때 체감할 수 있듯, 영화의 내러티브, 영화에 그려진 형상들은 실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 이야기와 피사체의 존재는 어디서부터 믿어질까. 파도와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사라져 버리는 성모의 존재처럼, 〈물안에서〉는 스크린에 띄워진 형상의 위태로움을 떠오르게 한다.
그 위태로움으로부터 〈콘크리트의 불안〉을 떠올렸다. 도시의 풍경을 담은 패닝 쇼트의 마지막, 허름한 아파트의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는 건물에 가까이 간다. 흔들리는 젖니에 대해 말하는 내레이션이 함께 들린다. 허름한 풍경 위로 전달되는 이야기는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이 곧 붕괴될 것만 같다는 인상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건물에는 이미 균열이 생겨 있고, 거주민의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으며, 벽에 적힌 낙서와 같은 흔적들만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무너져 가는 아파트의 마지막 날과 그곳에 담긴 기억을 담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모욕당했던 내레이터의 이야기를 듣지만, 지금껏 보아온 풍경에서 놀이터는 없었다. 내레이터는 도시의 끝에 놓인 아파트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지만, 첫 장면에서 본 풍경을 떠올려 보자면, 눈앞에 보이는 이 아파트는 도시의 끝에 놓여있는 것 같지 않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내레이션의 배경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후, 〈콘크리트의 불안〉의 모든 장면은 새롭게 보인다. 더 이상 쉽게 믿어지는 것은 없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귀로 들리는 내레이션의 자장 아래에 놓여있지 않고, 내레이션 또한 풍경에 그렇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독립된 두 가지 세계를 엮어내는 힘이 무엇일까 따져보게 되고, 그것이 각자의 적극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것의 의미를 따져볼 것이고, 증명할 수 없는 기억의 속성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물안에서〉와 〈콘크리트의 불안〉의 마지막 장면을 두려움 혹은 슬픔으로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화와 관객은 언제나 위태로운 자리에서 출발해 각자의 감흥을 발견해 낸다.
인디즈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