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세계의 친절한 안내서 혹은 한 편의 홍상수 영화

〈소설가의 영화〉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들과 그들의 욕망을 떠올리며, 우리는 ‘다 알겠다’고 생각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 그런 것은 없다. 홍상수는 한 번도 자기복제를 한 적이 없는 영화작가다. 거대한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려 고통받는 혹은 내 앞에 놓인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의 욕망 앞에서 허덕이는 남자들처럼, 그의 영화에는 익숙한 인간군상과 술자리가 등장하지만, 매번 그들의 관계가 변모하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변한다. 동일한 의미를 끝까지 가져가는 대사과 시공간은 없다. 하나의 상황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통로일 뿐이고, 통로를 지나며 사람과 사물들의 의미가 변화한다. 그의 모든 영화에는, 영화를 보며 우리가 움켜쥐려 노력하는 논리 바깥으로 벗어나는 비범하고 두려운 순간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의 잔혹한 살인, 죽어가는 감독을 대면하는 〈극장전〉(2005), 〈옥희의 영화〉(2010)와 〈자유의 언덕〉(2014)의 결말부, 〈밤에 해변에서 혼자〉(2016)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시의 풍경을 그리는 〈강변호텔〉(2018)의 카메라. 수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곧 개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탑〉을 미리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개봉된 그의 영화들보다 흥이 덜났다. 흥미롭지 않다거나 별로라고 쓰진 않았다. 흥이 덜 났다고 썼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영화들에는 언제나 주인공들에게서 비롯된 자아도취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나를 가두고 있는 세계의 거대함 아래 고통받는 남성들,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연대, 혹은 탈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대상으로 등장한 여성들이 주체를 가진 한 명의 타인으로 자리를 바꾸며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을 넘어, 최근의 영화들은 그들의 방향성을 믿어보며 끝맺는 것처럼 보였다. 풀잎을 굽어살피던 〈풀잎들〉(2017)의 아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서로를 껴안는 〈강변호텔>의 상희와 연주, 얼굴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겠다고 매번 다짐하는 〈당신얼굴 앞에서〉(2021)의 상옥처럼 말이다. 병수가 제발 ‘탑’에서 나가길 빌었다. 아니면 좀 다짐대로 살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병수를 똑바로 보는 일이 힘들었다.

홍상수 감독은 매번 인터뷰를 통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영화를 통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설가의 영화〉(2021)는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친절하게 자신의 창작비밀을 드러내는 영화다.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설가를 통해 눈앞에 놓인 세계를 영화로 담아내려는 본인의 렌즈를 드러낸다. 한 명 한 명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 나누며 내가 본 그 사람의 미덕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받은 감흥을 숨기지 않으며, 내 눈 앞에 놓인 세계와 사람과 함께 영화를 만든다. 수어와 망원경, 막걸리와 시 같은 작은 대화의 소재들은 매번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준희는 새로운 감각에 솔직하게 답하는 과정 사이에서 영화를 떠올리고 길수와 경우와 함께 영화를 만든다. 관객은 길수와 함께 준희의 영화를 조금 훔쳐보고,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길수의 시간을 바라보며 영화 만들기의 마법 같은 힘을 경험한다.

정말 그런가? 〈소설가의 영화〉를 다시 한번 보자. 영화의 시작, 현우에게 소리를 지르던 세원은 어떻게 된걸까. 준희는 왜 모습을 감출까. 홍상수 감독이 준희와 같은 방법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무슨 근거로 말할 수 있을까. 길수가 본 영화는 우리가 본 것과 동일한 것일까. 영화 바깥에서 쉽게 하나의 의미로 대답할 수 없는 순간들이 남아있다. 글을 쓰다 보니 〈탑〉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나는 영화를 보며 〈탑〉에 갇혀있는 기분으로 모든 인물을 쉽게 판단해버린 건 아닐까. 해옥은 정말로 뭘 하는 사람일까. 정수는 해옥을 떠나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병수는 제주도에 가서 영화를 만들게 될까. 물론 영화라고 하는 것이 인물들과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인물들의 자잘한 면을 부여잡고 싶어진다. 영화를 보는 중에만 경험할 수 있는 변화의 감흥들, 자리를 바꿔나가는 세계의 결과물로서의 홍상수의 인물들에 마음이 쓰인다. 나오는 대로 글을 써두고 보니, 홍상수의 세계를 똑바로 소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냥 팬심을 내어 보이는 글이 되어 버렸다.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탑〉을 다시 봐야겠다.

인디즈 김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