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과 동필, 승준의 공통된 진술은 이것이었다. 보지 못했더라면 군산에 살지 않았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살았을 것이고, 구태여 군산에 살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 다수의 간편한 말을 빌리자면, ‘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새만금에 집요하게 발을 들이는 이들의 죄목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것을 본 죄’다. 찰나의 순간이 프레임 단위로 찍히고, 동공에 정을 박아 넣는 것처럼 일격에 잔상이 새겨질 때. ‘본다’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로잡힌다’는 표현이 알맞아서 그 순간만큼은 무력하게 수동적이고, 내려놓음에 있어 아무런 저어됨이 없게 된다. 뒤져 보면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씩 자리하고 있을 그런 순간들은 대체로 비이성적인 선택지에 우리 발을 묶어 버리고 만다. 왜 그 고생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랑에 빠진다는 게 다 그런 거라고 답할 수밖에. 너에게는 불모지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한 숨이 느껴진다고. 그런 마음으로 수라와 관계 맺는 이들만이 기어코 척박한 땅을 갯벌로 살려 내고야 마는 것이다.
한편 어느 동네에서는 다큐멘터리팀 막내가 서툰 실력으로 처음 카메라를 든다. 영화 〈인서트〉 속 미라는 쪽잠을 자려는 선배에 의해 카메라 조작법도 모르는 상태로 떠밀리듯 내쫓겨 인서트를 따게 된다. 미라가 떨어진 동네는 어촌도 아니고, 얼핏 보면 두 영화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수라〉와 〈인서트〉는 대상이 나에게 의미를 가지고 특별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동류이다. 동시에 무언가 ‘애정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서트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매개한다. 씬과 씬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거나, 컷과 컷 사이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인서트의 역할은 존재 자체가 관계 맺음과 닮았다. 특히나 인서트를 따기 위해서는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들을 오래, 집중해서 포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익숙하지 않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미라는 처음에는 “찍을 게 하나도 없다.”며 친구에게 전화로 불평을 쏟아 낸다. 하지만 카메라는 차츰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미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기 시작한다. 미라가 작은 모니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곧 음악이 깔리고, 미라의 순간이 느리게 흐른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발이 꼬이고, 나도 모르게 입은 벌어지고, 입꼬리가 달싹이는가 싶더니 다시 홀려 정신이 빼앗긴다. 상상 속에서 미라의 발은 이미 중력을 잃었다. 도요새의 군무를 목격한 세 사람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온통 흑백인 세상에서 ‘하나도 찍을 게 없던 동네’는 어느새 얼굴을 바꾸고 미라에게 다채로운 세상을 보여 준다. 대상과 내가 눈을 맞추고 관계할 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수라〉에서도 그런 기적 같은 순간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땅에 여전히 맥이 뛰고 있음을 믿는 이들만이 목격할 수 있는 귀한 순간들의 향연. 우리가 모르는 새만금의 얼굴들.
영화의 말미에서 미라가 찍은 인서트들은 ‘안 봐도 비디오’인 것들만 찍었을 게 뻔하다는 선배에 의해 한번 확인해 보지도 못한 채 삭제된다. 전봇대, 가로등, 낙서. 미라가 본 것들을 간편한 이름으로 축소해 치워 버리는 그의 모습이 새만금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테다. 하지만 미라가 목격한 그 순간은 미라의 마음에 언제까지고 남아 끝끝내 미라로 하여금 카메라를 들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수라〉의 영제가 ‘어 러브 송(A Love song)’임을 기억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꿋꿋하게 그의 ‘진짜’ 이름을 지키는 일. 그런 세레나데의 영화들을 한데 모아 엮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