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로 12월 31일! 숨 가쁘게 지나온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모두들 오늘만큼은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리며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실 것 같아요. 올 한 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혼자서 정리해 보기도 하고, 또 내년은 어떤 것을 이루어볼지 계획을 세워봐도 좋을 것 같고요. 세어보니 지난 1년 동안 인디즈 큐는 총 50편의 뉴스레터를 보내드렸더라고요. 한 주씩 새로운 영화들을 소개해 드렸는데 그만큼 다양한 영화들을 이야기하다보니 금세 일 년이 다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의 2025년은 어떠셨나요? 그 안에서 어떤 감독과 어떤 배우를 만났는지, 새롭게 단골이 된 극장은 없으신지 궁금해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보내드리는 뉴스레터는 아무래도 일 년을 마무리하는 내용을 담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오늘은 인디즈 큐에서 2025년 동안 구독자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작품 다섯 편을 골라보았습니다. 개봉일 순서대로 강미자 감독의 〈봄밤〉,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박준호 감독의 〈3670〉,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 그리고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입니다. 이 중 여러분은 몇 편의 영화를 보셨나요? (모두 극장에서 봤다면.. 당신은 진정한 독립영화 사랑꾼! 💯)

'혼자'를 이야기하기보다 '따로 또 같이'를 이야기했던 다섯 편의 영화를 돌아보며 여러분 각자의 올 한 해를 돌아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인디즈의 리뷰를 읽으며 나만의 감상을 일기로 남기는 것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겠지요. 장편영화만 기억하기 아쉽다면,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는 올해의 미쟝센단편영화제 수상작을 함께 만나보면 어떨까요. 입소문을 탄 〈스포일리아〉, 〈벚꽃종례〉,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 등을 볼 수 있는 자리도 함께 소개합니다. 

··· 〈봄밤〉은 인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소란스러운 사건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시작된다. 인생에 기대할 것이 사라지고, 떠나간 자리의 공허함만이 남은 영경과 수환이 만난다. 남은 삶은 길게만 느껴지고, 지나온 삶은 무겁고, 틈새에서 위로를 찾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수환과 영경은 상대방이 자신의 상처와 비슷한 모양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아본다.
영경과 수환의 사랑은 서로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가장 빛나고, 가능성이 넘쳐나고, 인생에 기대할 것이 많은 순간이 아니라 지금 비틀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상대방의 취약함과 비틀거림에서 자신을 비춰본다.
흔히 사랑은 함께 고통을 극복하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봄밤〉은 회복 불가능성과 더불어 인생의 그 모든 상처가 누적된 신체와 함께하는 사랑을 말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주한 모든 아픔이 쌓인 시간에서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함께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마주 보며 이를 쓰다듬어보는 사랑이다. 각자가 겪었던 일들, 살아온 삶을 함께 끌어안고자 하는 의지다. ··· 

··· 영화는 장면들을 산발적으로 이어 붙이며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닌, 세밀한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관계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둘러싼 서로 다른 시점을 이어 붙이며 모호함은 가중된다. 다른 시점의 장면들은 인물이 들려주는 주관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지난 후, 그 관계를 겪어낸 이들의 이야기는 ‘둘’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에게 체화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사건 서술보다는 감정 묘사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영화는 이렇게 사건의 변두리에서 감정을 서술한다. 이는 고집스레 클로즈업을 사용하지 않는 영화와도 맞닿아 있다. 
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인물을 둘러싼 관계의 층위를 해명하기보다, 그 층위에서 파생되는 감정의 미묘함을 응시한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관계는 서술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이는 우리가 관계 속에서 끝내 나 자신으로만 남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다른 것으로 알려질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늘 오롯이 오독되는 경험의 연속이다. 영화는 잘못 읽히면서, 다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라진 나의 원형을 응시한다.

··· 불안과 상실의 아픔을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각자 다른 마음으로 창우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엄마와 동생, 장례식장 앞에서 말없이 다혜를 안아주는 알리, 차근차근 창우에게 용접을 가르쳐 주는 회사 선임까지. 연대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는 한편, 이런 배경의 영화에서 익히 떠올릴 법한 전형적인 악역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습생과 갈등을 빚는 직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역시 마냥 악역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들도 월급 지급 알림을 보고 미소를 짓고, 토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놓치지 않는 것은 따뜻한 시선뿐만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한 미묘한 폭력의 순간들 역시 카메라에 포착되어 있다. 이렇게 영화는 현실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회사에 남기를 택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3학년 2학기〉는 바뀐 작업장의 모습을 희망차게 담는가 싶다가도, 무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창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우리는 정식 직원이 된 창우가 앞으로 행복할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을지 알 수 없다. 현실 노동자의 모습과 가까운 무표정은 잠시 후 관객들이 만나게 될 극장 밖의 세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고, 나머지는 스크린 밖 여러분의 몫이라는 것. 극장을 나와 마주친 영화 포스터 안에서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가 영화를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눈앞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로 빠져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너무 닮아 있거나 인물에게서 나의 어떤 부분들을 마주하게 되는 영화를 피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을 보고 이런 영화가 나의 삶에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주인〉은 나의 마음 한구석을 세게 꼬집었다. 아프기보다는 그 감정이 멍처럼 오래 남아있다. ···

주인은 사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가꾸어 가는 사람이다. 분명 언젠가 과거의 상흔이 또다시 주인을 콕 찌르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럼에도 주인은 지금처럼 사랑을 하고, 뛰어 놀고, 장난도 치고, 울고 웃으면서 세상을 향해 씩씩히 걸어 나갈 것이다. 그런 주인을 오래도록 꼭 안아주고 싶다.

독립 단편영화의 오랜 친구,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올해 4년 만에 재개되며 큰 인기를 얻었었죠. 영화제 이후로도 서울을 비롯 부산에서도 주요 작품들이 상영되었는데요. 아쉽게도 극장 관람 기회를 놓치신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소식을 들고 왔어요. 바로 몇 작품들이 넷플릭스에서도 상영된다는 소식입니다.

이번 영화제에서 수상한 주요 작품들은 물론, 윤가은, 이상근, 이옥섭 등 걸출한 감독들의 지난 단편들도 감상할 수 있다는 소식이에요. 12월 24일부터 6개월간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하니, 한 달에 두세 편씩 꼭꼭 씹어 관람하기 딱 좋겠어요 🤗

여러분들은 이 글을 언제 어디서 읽고 계실까, 뉴스레터를 제작하면서 매번 상상합니다.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읽고 계실까, 의자에 앉아 모닝커피 한 잔과 함께 메일을 보고 계실까, 아니면 어느 먼 훗날에 밀린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문득 보게 되셨을까...😉

구독자분들의 모습이 궁금하지만 그럴수록 극장 안을 더 들여다보게 됩니다. 저 멀리 객석에 앉아있는 분이 구독자일 수도 있지, 생각하면서요. 가끔은 구독자분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서두르지 말고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직접 만나 뵐 수는 없지만 상상의 힘을 빌려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어요. 내년에도 올해처럼 변함없이 극장에서 뵐 수 있기를, 유익한 독립영화들이 우리를 찾아오기를! 그런 소망을 담아 내일을 기다립니다. 모두 올 한 해 수고 많으셨고요, 내년에도 기쁘고 복된 날들 보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