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으로 일하는 '문정(김서형)'의 하루하루는 고단합니다. 제대로 된 거처 없이 비닐하우스에서 머무는 문정은 소년원에서 곧 나올 아들과 함께 번듯한 집에서 살기 위해 묵묵히 고된 일을 하죠. 시각장애인 남성이 있는 집에서 치매 노인 여성 '화옥'을 간병해야 하는 문정은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며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요. 그러던 중 실수로 화옥이 죽게 되고, 책임을 떠맡게 된 문정은 거짓을 일삼으며 상황을 모면하고자 합니다.
세상이 온통 나를 도와주지 않아서 급기야 나조차 나를 원망하게 되는 경험, 님도 겪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솔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비닐하우스〉는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진 문정의 시간을 따라가며 그녀의 선택이 불러오는 처참한 결과를 목격하게 합니다. 열심히 살아보려 했는데 노력하면 할수록 실패하는 듯한 느낌, 아래 인디즈가 선택한 〈선희와 슬기〉에서도 엿볼 수 있어요.
앙상하게 드러난 존재의 감각
〈비닐하우스〉
“자해인지도 몰랐어요.”
카메라의 시선은 제 머리를 쳐대는 문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천천히 줌아웃하며 비추는 풍경은 다름 아닌 비닐하우스, 문정의 집이다. 바스락거리는 천막 아래 우유 박스가 어지럽게 쌓여있다. 박스 위 깔린 장판은 도드라진 바닥 균열이 느껴질 정도로 얇아 보인다. 허름한 골조 위 단정하게 놓인 이불과 베개. 문정의 침대다. 깡마른 철골이 버티고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문정은 단잠에 든다. (중략)
이솔희 감독은 사회 여러 조각으로부터 날실을 뽑아 촘촘히 영화를 직조해 낸다. 수도권에 거주하지 않는 문정이 이혼 후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 탈시설 후 실질적 자립에 실패한 발달장애 3급 순남, 시력을 잃고 삶의 주체성을 잃은 채 문정의 도움에 의지하는 태강까지. 영화는 노인, 돌봄 노동 여성, 장애인 같이 선택이 존중받지 못하고 자신의 경계가 존재할 것이라 전제되지 않는 사람들의 열망을 조명한다. 그러나 영화는 차갑다. 뜨겁고, 처참해 보이는 현실을 담아내고 있음에도 카메라는 냉정하다. 느긋하고 담담하게, 단 절정에 이르기 전 커트. 중요한 순간 전환돼 버리는 화면은 과잉될 수 있는 감정을 예방한다. 대신 관객이 비집고 들어갈 이야기의 틈을 제공한다. 감정이 아닌 맥락과 상황만 전달한 채 공감과 이입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후략)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는 ‘문정’은 아들과 함께 살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 ‘화옥’을 돌보다가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나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병원에 연락을 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울리는 한 통의 전화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문정’은 아내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시각 장애인 ‘태강’을 속이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한 사람의 파국은 과연 어디까지 튕겨질까. 요양사로 일하는 문정은 몸과 마음이 모두 벼랑 끝에 내몰린 채 매 순간을 견뎌낸다. 모든 날숨이 한숨처럼 가라앉는 그녀의 호흡에는 어떠한 희망도 솟아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억울한 이 일을 덮기 위해 문정은 거짓을 꾸미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후의 시간들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며 점차 박살 나기 시작한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는다. 새로이 탄생하는 거짓들은 돌다리가 연장되듯 이어지고 문정은 이를 건넘으로써 삶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한다. 그러나 영화는 하늘을 태울듯한 화염을 그녀에게 되돌려주며 끝이 난다. 그녀의 삶은 어디까지 파괴된 것인지, 그리고 그 파편은 어디까지 이르렀을지를 곱씹으며 상영관을 나섰다.
영화는 한 인물의 삶을 극한까지 도려낼 때 돌출되는 실존 본능을 영화의 추동력으로 사용한다. 다만 지나치게 이 힘에 의존하다 보니 인물이 처하는 상황이 작위적으로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인물들의 절멸로 비극을 극화시키는 영화의 결말 역시 다소 상투적으로 다가온다.
〈비닐하우스〉를 보고 나니 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가 떠오른다. 두 영화 모두 자기 삶을 위한 거짓이 낳은 파국을 그려낸다. 새 출발을 위해 지난날의 얼룩을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어떤 얼룩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지를 가늠해 보며 두 영화를 나란히 둬 본다.
인디즈 김채운
〈선희와 슬기〉
감독 박영주|70분|드라마
“제 이름은 선희입니다." 18살 ‘선희’는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러나 작은 거짓말은 친구의 자살을 부르게 되고, ‘선희’는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데...
“제 이름은 슬기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난 ‘선희’는 모범생 ‘슬기’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하는데…
현실적인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이 느껴지는 〈비닐하우스〉는 신예 이솔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이솔희 감독은 전작 단편들에서도 역시 현실에 기반한 소재와 줄거리로 가장 영화적인 이야기를 완성했는데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삶' 자체와 부대끼는 인물들을 주로 그린 이솔희 감독의 단편들의 모습을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할 수 있는 것〉
출연 강길우, 곽민규, 한해인│15분│극영화
장우는 자살을 하러 산에 갔다가 완벽한 자살스팟을 발견한다. 스팟의 주인인 영일을 만나게 되며 자신에게 자살 공간을 팔라고 말하는데…
〈닮은것들〉
출연 김종구, 강길우, 문상훈│15분│극영화
사별한 아내의 첫 제삿날 영복의 두 아들이 집으로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세 부자가 제사상을 차리는데 큰아들 기석은 영복이 신신당부하던 배를 잊어버리고 사오지 못한다. 영복은 기석을 나무라고 두 사람의 싸움이 커진다. 아버지와 형의 싸움에 지칠대로 지친 작은 아들 유석은 배를 사러가지만, 새벽시간에 문 연 가게는 없다.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배를 포기할 수 없는 영복은 두 아들에게 옆 동네 배 밭으로 가자고 한다.
〈개미무덤〉
출연 최도윤, 양조아│26분│극영화
아홉 살 도진은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어느 날 개미무덤을 만들러 뒤뜰에 갔다가 살인현장을 목격하고, 흉기로 쓰인 피 묻은 벽돌을 집으로 가져온다. 아이의 눈으로 본 학교 폭력, 왕따, 살인 등의 이야기가 예측불허의 미스터리극으로 옮겨진다.
〈그 여름의 끝〉
출연 김자영│16분│극영화
4학년 자영은 곧 있을 학예회에서 리코더를 불고 싶다. 하지만 아무도 자영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자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 대응한다. 따뜻하고 귀여운 음악 성장영화.